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네치아 공화국 (문단 편집) == 베네치아인 == 베네치아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라이벌이었던 [[제노바 공화국]]이 쇠락하면서 [[코르시카]] 섬을 프랑스에 넘길 때, "우리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이라며 그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코르시카 섬을 팔아치운 제노바도, 그리고 그 제노바를 비웃은 베네치아도 나란히 프랑스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것도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장군이 된 나폴레옹에 의해.]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이 도시국가라는 특성과 결합하면서 도시국가 치고는 매우 넓은 영토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본토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개국 초기에 편입한 달마티아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의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그리고 달마티아인을 차별하지 않은 이유도 개국 초기에 [[자다르]]를 비롯한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일찍 편입한 것과 함께 달마티아 공작을 겸임한 도제의 특성상 달마티아인을 차별한다면 그건 자아부정에 가까울 것이며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을 위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베네치아 본토인들이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인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키프로스인이 몰래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에게 찾아가 키프로스를 정복해 달라 요청했고, 키프로스가 함락당할 때 기독교도들이었던 키프로스인들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군을 환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키프로스만의 문제는 아니라서 Stato da Mar를 구성하는 현지 주민들은 크레타 섬이나 모레아 지역 같은 중요 지역만 따져본다고 해도 사실상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활용은 했지만 민심은 전혀 얻지 못했던 것이며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렸다. 이러한 차별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베네치아 본토인 섬 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본토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덕분에 본토 속령의 면적이 넓어지고 인구도 베네치아 본토의 10배가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본토 속령의 인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심지어 본토 속령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후기에 가서는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본토 출신의 귀족이 도제가 되자 망조라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베네치아인들의 우월주의는 이와 같이 식민지와 속령 주민들의 반발을 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베네치아 본토의 도시내에서도 차별이 심했는데, 도시 거주자중 실제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10%도 안되었고, 다수는 외국인 노동자나 [[노예]]였다. 그 위에는 주변 지역이나 외국에서 이주해온 상공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특히 독일계 이민자들은 주로 베네치아의 모직 작업장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 위에는 관료로 선출될 수 있는 소수의 시민권자들이 존재했다. 계급 [[피라미드]]의 맨 위에는 베네치아의 핵심 가문들이 모여 만든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가 자리했으며, 이 대평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일부 가문에 제한돼 상속되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3% 정도인 소수였다. 악명높은 [[유대인]] [[게토]]도 베네치아가 원조였다. 종합하자면 베네치아인들의 [[애국심]] 덕분에 키오자 전투 같은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나라에 돈을 기부하고 군에 입대해 결국 승리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이점이 존재했으나 자부심에 따른 심각한 차별조치는 충분히 본토의 주민으로 융합될 수 있었던 본토 속령의 주민들까지 따로 놀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여 국민국가로 발전할 수준의 영토와 인구를 보유했지만 도시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에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하고 끝내 재건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과 오랜 세월동안 대립관계였지만 오스만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베네치아 출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셀림 2세]]의 애첩인 누르바누 술탄[*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이자 베네치아의 국가원수로 선출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혈육이라고 한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부리는 [[해적]]들이 납치한 것이라, 누르바누가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세바스티아노가 관여한 바는 없었다.]과 무라트 3세의 애첩인 사피예 술탄이 이들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누르바누의 경우 유대계라는 주장도 있는데다가 사피예는 알바니아 출신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누르바누는 기록에 따라 베네치아를 싫어했다고도 하지만 오스만 제국 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도 하며, 사피예의 경우, 확실히 친베네치아적이어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이 여자를 잘 구슬리면 우리 공화국에 유리할 듯 합니다."라는 식의 보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공화국의 재기를 주장하는 정당의 조사에 따르면 독립을 원하는 주민의 수가 [[무려]] 89%라고 한다. 위 투표는 온라인 투표라서 실제 여론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베네토 지역이 다른 북부 지역에 비해서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경제난이 심화되어 주민들의 반발이 현재보다 과격해진다면 몇 세기만에 부활하는 공화국을 볼 지도 모를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